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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6권

apuj 2024. 2. 11. 08:14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극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 아마 사건위주의 암기식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사관에 의하지 않고 통치계급의 이념에 끼워 맞춘 역사인식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란 당시 정치지도자들과 미군정청과의 갈등 그리고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던 것이 전부인양 알고 있기도 하다.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60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그것들을 새롭게 안다고 뭐가 달라질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지금이나마 그 때의 일들을 살펴보는 까닭은 과거를 한탄하고,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교훈 삼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때의 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역사학자 김기협이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기 위해 쓰는 해방일기는 우리가 지금까지 얼핏 알았던 많은 것들을 세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는 1945년 8월 해방 전후부터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1948년 8월까지, 3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총 10권의 책에 일기형식으로 담겠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여섯 번째 책으로 1947년 1월부터 4월까지 넉 달 동안, 해방 후 1년반이 지난 시점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담고 있다. 그 기간 동안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가 부제로 달은 것 마냥 ‘냉전에 파묻힌 조선해방’으로 칭할 수 있다. 통일건국은 미군정과 자신들의 정권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 땅의 극우세력에 의해 물 건너가고, 그것은 친일파들에게 친미파라는 또 다른 변신의 길을 만들어 주었다. 해방 후 1년이 지나자 남과 북은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북은 조선인의 자치를 기초로 점령군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지만, 남은 경찰력을 비롯한 야만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군정이 지속 강화되고 있었다. 미군정은 입법과 행정 등 모든 면에서 조선인화를 추구하고는 있었지만 그것들은 이름뿐이었고, 모든 실권은 미군정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의 자치를 근본적으로 발전시킬 뜻이 없었던 것이다. 1947년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미소공위 재개여부와 반탁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안에 대한 반대로 김구의 임정세력과 이승만은 손을 잡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김구의 반탁은 미,소의 영향력을 배제한 조선의 즉시독립을 주장한 반면, 이승만은 연합국의 공조를 와해시켜 조선을 미국의 영향력아래 두는 것이 자신의 정권획득에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반탁이었다. 미군정은 미소공위를 결렬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좌우합작을 지원하고 중도파인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기용하며, 조선인화 정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미군들의 민간인 폭행과 부녀자 강간등과 같은 만행과 경제파탄 등으로 인한 조선인민의 증오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그나마 그들이 택한 조선인은 무늬만 조선인이지 민족의식도 도덕성도 극히 취약한 일제 식민지지배세력의 하수인들 이었다. 이런 극우세력에게 중도파가 실권을 잡고, 미소공위가 재개되는 것은 하나의 위협이었다. 비록 미군정에 업혀서 힘을 키워온 극우이었지만, 이제는 미소공위를 파탄 내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하여 反하지, 反군정 운동을 본격화 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 미군정은 이제 현상유지를 위해서라도 극우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 동안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소련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미국의 정책변환과 이에 빌붙어 정권을 차지하려는 극우세력에게 단독정부 수립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1946년 12월 국면전환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은 아무런 성과 없이 4개월의 미국체류를 마치고 귀국한다. 그러나 그가 미국에 체류 중일 때 나온 트루먼독트린은 그에게 분단건국으로 향하는 길을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반공을 전면에 내세우며, 임정세력과도 갈라서면서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된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신념에 의한 반공주의자가 아니라, 책략을 위한 반공주의자였을 뿐이다. 이즈음 입법의원들이 만든 친일파특별법이 미군정에 의해 비준거부 되었다. 이는 이승만과 그를 추종하는 한민당의 극렬한 반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는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미군정이 친미파로 재활용하면서 더 큰 특권을 키워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들의 면면이 오늘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자신이 뼛속까지 친미파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들도 자신을 친미파라 생각하지 않고, 아예 미국인이라 생각한 이승만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말이다. 해방 후 1년 반이 지난 시점, 그 당시 벌어진 모습들이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낯익은 것들이다. 바로 현재의 우리 모습이란 생각이 든다. 여야로 갈린 수구세력들, 그리고 양극단에 포진한 극우와 극좌세력들, 그들은 해방이래 아직도 적대적 공생관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들에겐 정권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정권을 잡던 그들의 기득권과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방공간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저자는 해방공간에서 미국이 우리에게 끼친 해악의 대부분은 조선을 망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무식하고 게을러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안 했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7년 여름, 남조선에서 그리고 북조선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우리는 그 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또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다음 권이 자꾸만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을 냉전의 길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승리

김기협의 해방일기 는 해방공간의 한국 정치 지형을 ‘좌우 대립’이 아니라 중간파와 좌우 양극단의 갈등으로 파악하자는 ‘중극 대립’의 시각으로, 학계 안팎의 지식인과 시민사회에서 갈수록 반향을 얻고 있다. 해방공간 전반기를 돌아 1947년 1월에서 4월까지 시공간을 다룬 해방일기 6권 -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 이 출간되었다.

1946년 12월 초순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이승만의 위상은 김구, 김규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4개월간의 미국 체류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경쟁자들을 확연히 따돌리고 분단 건국을 통한 권력 장악을 향해 치달려가게 된다.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던가?

안재홍의 민정장관 기용은 1946년 여름 이래 계속되어온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의 흐름 속에 이뤄진 일이었다. 미군정의 중도파 등용에 이승만은 하지를 용공 ‘빨갱이’로 매도하면서 격렬히 부딪친다. 이승만의 미국 체류 중에 나온 트루먼독트린은 남조선의 분단 건국과 이승만의 권력 장악을 향한 길을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머리말 조선을 냉전의 길로 몰아넣은 이승만의 승리

1 반탁운동 재개와 건국 노선 갈등
1947년 1월 2 ~ 30일

1947. 1. 2. 김구와 한독당, 노선이 보이지 않는다
1947. 1. 4. 입법의원을 둘러싼 동상이몽(同床異夢)
1947. 1. 9. 미군 전용 열차 강간 사건, 당한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1947. 1. 11. 하지의 ‘변절’에 분노한 반탁 세력
1947. 1. 13. 모리배와 탐관오리, 빙산의 일각을 본다
1947. 1. 16. 미군정 ‘조선인화’는 어떤 조선인에게로?
1947. 1. 18. 이승만·김구·하지의 동상이몽
1947. 1. 20. 우익에게 ‘공공의 적’이 된 김규식과 합작위원회
1947. 1. 23. 맛만 보고 도로 빼앗긴 ‘설날’
1947. 1. 27. 뼛속까지 친미파? 이승만 앞에 부끄러워하라
1947. 1. 30. ‘반역 집단’으로 몰리는 좌우합작위원회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분단만은 안 돼! 백범께서 나서주셨으면

2 김구·이승만의 동상이몽
1947년 2월 1 ~ 29일

1947. 2. 1. 천도교청우당이 조선노동당의 외곽 단체?
1947. 2. 3. 김구, 어디까지 애국자였고 어디서부터 정치인이었나?
1947. 2. 8. 행정권을 맡기며 경제권을 안 주는 ‘조선인화(Koreanization)
1947. 2. 10. 김구가 반탁운동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1947. 2. 12. 반탁 세력, 너희들 속셈은 밝혀졌다
1947. 2. 15. 하지의 ‘소환’에 어떤 의미가 있었나?
1947. 2. 17. 존 하지, 다른 데서 필요치 않아 조선에 보내진 인물
1947. 2. 20. ‘고문(拷問)권 수호’를 위한 경찰서장들의 ‘데모’
1947. 2. 22. 장개석 눈에 이승만이 어떻게 보였을까?
1947. 2. 24. 남조선 해방 정국의 축도(縮圖) ‘국대안 파동’
1947. 2. 29. 가짜 김일성 설은 박헌영이 시작?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민정장관, 자신 있어요?

3 외세에 따른 분단 건국 vs. 통일 건국
1947년 3월 1 ~ 28일

1947. 3. 1. ‘도둑적으로 완벽’했던 장택상
1947. 3. 2. 남쪽의 선거와 북쪽의 선거, 어떻게 달랐나?
1947. 3. 7. ‘군대’를 ‘군대’라 부르지 못하고......
1947. 3. 9. 김구, 이승만 없는 사이에......
1947. 3. 12. ‘해방군’의 허실을 보여준 그리스 내전
1947. 3. 14. 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배신한 스탈린
1947. 3. 16. 마카오에서 온 ‘보물선’
1947. 3. 19. 한반도로 밀려온 트루먼독트린의 쓰나미
1947. 3. 21. 장택상, 어떤 사람이었나?
1947. 3. 21. 절제된 파업, 절제 없는 검거
1947. 3. 23. 여운형이 뉴델리에 갔더라면!
1947. 3. 26. 친일파 문제를 묵살하는 미군정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외세에 대한 태도로 갈라지는 정치 노선

4 미군정, 친일파에게 친미파의 길을 열어주다
1947년 4월 2 ~ 30일

1947. 4. 2. 중국의 국공내전에 북조선 군대가 참전?
1947. 4. 4. 테러범, 경찰, 동아일보 합작의 블랙코미디
1947. 4. 9. 미군정의 ‘엿장수 군정 재판’
1947. 4. 11.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소공위 재개!
1947. 4. 16. 미군정의 친일파 ‘재활용’ 정책
1947. 4. 18. 친일파의 나라, 잔짜 책임은 미(美)에 있다
1947. 4. 20. ‘민족주의 진영’의 허와 실
1947. 4. 23. 외교에는 귀신? 이승만 방미 외교의 실체
1947. 4. 25. 이승만, 임정을 등지다
1947. 4. 27. 서재필이 오면 이승만을 누를 수 있을까?
1947. 4. 30. 서울시 학무국 마틴 고문, 어글리하지 않은 미국인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사악함’보다 ‘우둔함’이 더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