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영웅들
기독교학교에서 6학년 초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가장 두려운 격언은 ‘어떠한 공동체든지 리더(교사)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 설 때마다, 아이들에게 한마디 한마디를 건낼 때마다 두려움과 떨림이 저의 마음에 자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도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신앙의 거대한 영적선배들을 만나는 일, 그들의 저작과 전기를 읽는 일은 저에게 커다란 설레임이며 기대감 그 자체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을 보면서 저의 부족한 삶을 돌아볼 수 있고, 그들이 남긴 신앙의 유산을 보면서 저의 삶에 존재하는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움과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가려 하는 열정없음에 한탄하게 됩니다.
이번에 읽게 된 ‘은혜의 영웅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단순히 ‘아, 루터선생님과 칼빈선생님은 이렇게 부지런했었는데 난 이게 뭔가..역시 게으르군.’라고 느꼈습니다. 재독을 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첫 번째는 독후감 공모전 소식을 듣고 다시금 책을 집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적과 달리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상황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내 안에 가치없는 것들을 추구하는 마음, 성경에 대한 경박한 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두운 눈. 이런 내가 지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성경과 그것을 토대로 한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라니...
두 번째 이유는 제 마음의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본서를 한번 읽을 무렵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부흥과 회심이야기’를 읽었을 때보다 더 커다란, 경건하지 못한 저의 모습에 대한 심한 괴로움이 저의 영혼 가운데 자리 잡았습니다. 마치 가물어 갈라진 땅을 보듯 저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극심한 외로움과 어두움이 저의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듯 했습니다. 몇 일간 이러한 상태-아직도 이러한 상태이지만-로 괴로워하던 저에게 본서의 세 사람의 인물이 떠오르더군요. 어거스틴, 루터, 칼빈.
저자인 존 파이퍼가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순으로 저술한 것이 꼭 저를 위해 그렇게 쓴 것이라고 느낄 만큼 이 책은 커다란 위로와 도전이 되었고 비교할 수 없는 목적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추구했던 ‘최상의 기쁨’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이 더 이상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에 만족해하고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머리로만 알고 있던, 단순히 이론-왜 전에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이렇게 많았을까요? 지금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에게는 ‘새삼’이라는 단어가 많이 필요합니다-에만 머물러 있던 요한일서 5장 3절 말씀 안에서 저의 가슴과 삶을 울리는 경종이 되었습니다. 입으로만 고백했던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라는 찬양이 거대한 빛이 되어 죄된 저의 마음을 비추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어거스틴을 거쳐 루터로 이어지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루터를 통한 말씀에 대한 진지함은 ‘최상의 기쁨’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을 알려주었는데, 바로 ‘성경연구’였습니다.
솔직히 평소에 성경에 대한 추구보다는 아이들 앞에 서야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준비했던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지 못했고 아이들보다 먼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루터가 가장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루터의 그 노력은 최상의 기쁨을 향한, 최상의 가치를 향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었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의 고뇌 또한 보여주었습니다.
루터의 이것은 첫째, 위로였습니다. 루터라는 거대한 영적 선생님을 통해 현재의 나약하고 더러워 괴로워하는 저의 모습을 투영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인간 루터를 통해 지금 내 안에 있는 영혼의 갈급함이 헛된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에 참으로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하나님의 은혜로 허락하신 소망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였습니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습니다.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지도 모른 체. 이제 후로는 이 소망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일이 남겨진 것이지요.
둘째, 도전이었습니다. 교사로서 의무감과 부담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섰던 저는 루터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최상의 가치를 추구하려하는 기쁨의 태도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죄인된 나의 노력 또한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내가 먼저 말씀의 가치와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의 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진리로 이끌 수 있겠습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끔찍한 일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요즘같이 좋은 성경교재가 많이 출판되는 시대에 평신도라고 해서 성경을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에 전에 구입해 두었던 개인성경공부 교재들을 꺼내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선생님은 이러한 저의 작지만 커다란 여행에 최종적인 목적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더 이상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참으로 더럽고 추악한 죄인입니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기도와 찬양,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 지식의 결과물들, 기독교세계관적 발언들을 흐믓하게 바라보며 ‘아, 이 정도 가르치면 나도 꽤 유능한 교사지’, ‘참, 요즘 나같은 교사가 어디있어?’라고 생각하는, 가슴이 터질 듯한 교만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 순간 가슴을 짓누르는 교만의 죄악이 자신을 사망으로 이끄는 지도 모른 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저같이 추악한, 죄인된 본성으로 가득차있는 자에게 ‘교사’라는 직분을 주실 수 있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은혜’라는 말 말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침묵하시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 안에 변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는 죄들을 바라보게 해 주셔서 참 다행입니다.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인 이 백조들 또한 침묵하게 하시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부족한 교사로서 어거스틴과 함께 최상의 기쁨을 바라보고, 루터와 함께 성경을 바라보고, 칼빈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경교사가 아닌, 진리의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영광된 일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커다란 가치를 부여해 주신 길이기에 열심히 가고 싶습니다. 부족한 나를 일깨워 주웠던 이들처럼. 이러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길이 빛나는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으로 부터 배우는 교훈을 수록하고 있는 책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비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갖도록 해 준다. 우리가 은혜를 최고의 기쁨으로 바라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터득한 뒤, 루터의 연구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건하게 되고 칼빈의 설교에서 배운 교훈을 통해 영적 거장들이 남긴 지상 최고의 기쁨의 유산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머리말
감사의 말
서론: 불완전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맛보는 주권적 은혜
1장 최상의 기쁨
아루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에 나타난 거룩한 기쁨의 자유하게 하는 능력
2장 경건한 성경 연구
마르틴 루터와 외적인 말씀
3장 말씀의 신적인 위엄
존 칼빈의 인격과 설교
맺음말: 완전하지 않은 성도들의 생애에서 배우는 네 가지 교훈
인명색인
만들다
만들다[만들다]라는 동사로 [만든다]는 행위를 깊이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책흙으로 무엇 만들지/흙으로 뱀 만들지옷으로 무엇 만들지/옷으로 허수아비 만들지전기가 무엇 만들지/전기가 빛 만들지군고구마는 무엇 만들지/군고구마는 방귀 만들지군대는 무엇 만들지/군대는 전쟁 만들지/전쟁은 무엇 만들지? [만들다]라는 동사로 [만든다]는 행위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책 아이들이 별 생각 없이 하는 [만든다]는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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